포커스] 현대자동차, 미국 시장서 자충수 뒀나?
"10년·10만마일 무상 보증수리"… 갈수록 비용 늘고 수익성은 떨어질 전망

지금부터 꼭 2년 전인 2000년 1월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열린 ‘북미(北美) 국제 모터쇼’의 현대자동차 전시관에는 유난히 많은 관람객들이 몰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싸구려 차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던 현대차 전시관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 것은 자동차를 보기 위해 온 것이 아니었다. 현대차가 전시관 상단에 큼직하게 내건 ‘10년·10만마일 무상 보증 수리’라는 현수막 때문이었다.
관람객들은 “정말 10년·10만마일 운행기간 동안 무료로 수리를 해 주느냐?”부터 시작해 “현대차가 10년을 타도 버틸 정도로 성능이 좋아진 거냐 아니면 돈이 그만큼 많다는 것이냐?”, “이거 소비자를 상대로 한 사기(詐欺) 아니냐? 정말 믿어도 좋으냐?” 등 의심어린 질문들을 쏟아냈고, 전시장에 나온 현대차 미국 판매법인(HMA) 직원들은 이들의 의심을 해소해 주느라 진땀을 흘려야만 했다.
함께 전시관을 연 미국과 일본, 유럽지역 자동차업체 직원들은 “저렇게 오래 보증수리 해주다간 회사가 오래 버티지 못하고 얼마 가지 않아 거덜날 것이다”, “현대차가 소비자들을 상대로 마케팅 실험을 하고 있다”는 등의 말로 관람객들의 의구심을 부추겼다.
이런 의구심에도 불구하고 현대차는 ‘10년·10만마일 무상 보증수리’ 마케팅 전략을 통해 미국시장에서 돌풍을 일으켰다.
현대차가 미국시장에 10년·10만마일 보증수리제도를 도입한 것은 1998년 하반기 무렵이었다. 현대차는 1999년 한 해 동안 소비자들의 반응이 좋자 2000년부터는 대대적인 광고를 시작했다. 그리고 2000년 7월부터는 계열사인 기아자동차도 미국 수출 차량에 대해 10년·10만마일 무상 보증수리를 도입했다.
지난 3년간 10년·10만마일 무상 보증수리 전략은 일단 성공을 거두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미국시장에서 현대차 판매대수는 1998년까지만 해도 9만1217대에 불과했으나 1999년 16만4190대, 2000년 24만4391대, 2001년 34만7287대로 크게 증가했다. 기아차 판매물량까지 합하면 2001년 한 해 동안 모두 57만1008대를 미국시장에서 판매했다.
뉴욕타임스와 월스트리트 저널 등 미국의 유명 언론들이 잇따라 자동차 특집면을 통해 현대차의 성공을 대서특필했고, 자동차 전문 평가기관인 JD파워와 소비자 조사기관인 컨슈머리포트 등은 현대차의 성능과 소비자만족도가 높아졌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미국시장의 판매 증가 덕분에 정몽구(鄭夢九) 회장의 명성도 높아졌다. 정 회장은 지난해 2월 아시아에서는 두 번째로 미국 ‘자동차 명예의 전당’에 이름이 올랐고, 최근에는 미국 경제전문 주간지 비즈니스위크 아시아판의 표지 인물로 등장했다.
미국시장에서의 판매 신장과 국내시장 호황에 힘입어 현대차는 지난해 22조5000억원의 사상 최대 매출실적을 거뒀다.
미국으로의 자동차 수출이 늘어나면서 현대차의 야심은 더욱 커졌다. 현대·기아차의 미국 수출대수가 60만대에 육박한 상황에서 계속해서 한국에서 만든 차를 배로 수송해 판매하는 것이 효율적이냐는 지적이 나오면서 미국에 현지공장을 짓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에는 “한해 한국이 미국에 수출하는 자동차 대수가 50만대가 넘는 데 비해 미국이 한국에 수출하는 차는 겨우 2000대에 불과하다”며 양국간 자동차 무역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한국 정부가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압력을 행사하고 있는 미국의 입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현대차가 미국에 현지공장 설립을 추진하면서 최근 서울 양재동 현대자동차 사옥에는 미국 주지사들이 잇따라 찾아오고 있다. 지난해 11월 앨라배마주 주지사를 시작으로 캔터키주·오하이오주·미시시피주·미주리주 주지사들이 이미 다녀갔거나 조만간 방문할 계획이다.
미국의 주지사들이 이역만리(異域萬里)를 건너와 현대차 사옥을 찾고 있는 이유는 현대차가 미국에 짓기로 발표한 현지공장을 서로 자신들의 주에 유치해줄 것을 요청하기 위해서다.
1980년대 초반 현대차가 포니를 앞세워 처음 미국시장에 진출하면서 미국 정부의 자동차 형식 승인을 얻기 위해 기술진이 밤을 지새웠던 시절과 비교하면 괄목할 만한 변화다. 현대차는 올 상반기 미국 현지법인 설립계획을 확정할 방침이다.
현대차의 10년·10만마일 무상 보증수리 전략을 두고 경쟁 관계에 있는 일본 업체나 국내의 대우자동차는 칭찬을 아끼지 않고 있다. 미국시장에서 판매되는 자동차 브랜드 가운데 밑바닥에 있던 ‘현대’를 몇 단계 끌어올리는 데 일단 성공했다는 평가다.
하지만 10년·10만마일 무상 보증수리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높다.

첫째 사전에 철저한 조사 없이 시작했다는 점이다.
무상 수리기간을 결정하는 문제는 보험회사가 보험료를 결정하는 것처럼 복잡한 문제다. 2만개에 달하는 자동차 부품의 수명이 제각각 차이가 나는 점을 고려해야 하는 것은 물론 사전에 시험 가동을 통해 치밀한 데이터를 확보한 뒤 무상 보증수리 기간을 늘릴 경우의 이익과 손실을 계산해야 한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현대차가 이런 분석작업을 거친 후에 10년·10만마일 무상 보증수리제도를 도입한 것인지 의문”이라고 말한다. 현대차 내부에서조차 5년 후 또는 10년까지 들어가는 무상 보증수리 비용을 정확히 계산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둘째 시간이 갈수록 비용이 증가하고 수익성은 떨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10년·10만마일 무상 보증수리제도는 일종의 할인판매와 같다. 자동차업계에서는 무상 보증 수리 기간을 1만마일 늘리면 자동차 1대당 연간 5만∼6만원의 추가비용이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판매 측면에서 보면 자동차가격을 그만큼 싸게 해주는 셈이다. 아직은 10년·10만마일 무상 보증수리제도를 도입한 지 2~3년밖에 지나지 않은 초기여서 비용 발생이 적지만 4~5년이 지나면 수리비용이 크게 늘어날 수 있다. 물론 현대차도 미래의 무상 보증수리 비용이 늘어날 것에 대비해 충당금을 쌓고 있긴 하다. 하지만 수리비용이 충당금을 초과할 경우 수익성은 급격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

셋째 10년·10만마일 무상 보증수리를 내세울 만큼 품질이 뒷받침해주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지난 10년 사이 현대차를 포함한 국산 자동차의 품질 수준은 상당히 높아진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10년·10만마일 무상 보증수리를 해주어도 될 만큼 품질 향상이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의문이다. 건설교통부에 따르면 지난해 현대·기아차에서 발생한 리콜(Recall·제작 결함에 따른 무상 교환수리)은 모두 15차종에 걸쳐 47만대가 넘는다. 리콜은 자동차업체가 소비자를 보호하기 위해 실시하는 것이긴 하지만 리콜 횟수가 많을 경우 자동차업체의 품질관리가 그만큼 허술하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넷째 소비자 성향을 사전에 예측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10년·10만마일 무상 보증수리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올 때마다 현대차는 “최초 신차 구입자에게만 무상 보증 혜택이 있고, 중고차 구입자에게는 혜택이 없다”면서 “미국 소비자들의 자동차 교체주기가 평균 5년 안팎이기 때문에 우려하는 것보다 무상 보증수리 비용이 적을 것”이라고 주장해 왔다.
하지만 현대차를 구입한 미국의 소비자들이 5~6년 사이에 차를 바꿀 것으로 낙관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다. 현대차 미국법인은 영업사원이나 직장에서 은퇴한 사람들이 집중적으로 현대차를 구입할까봐 상당히 걱정하고 있다.
하루에도 수백마일씩 차를 몰아야 하는 미국 영업사원의 입장에서 보면 현대차가 내건 10년·10만마일 무상 보증수리 조건은 ‘공짜 판매’에 가까운 파격적인 조건이다.
또 직장을 은퇴하고 앞으로 더 이상 차를 바꿀 생각이 없는 노인들도 10년간 추가적인 수리비용이 필요없는 현대차를 선호할 수밖에 없다. 이들이 현대차를 집중적으로 구입할 경우 무상 보증수리 비용은 현대차의 예상보다 늘어날 수밖에 없다.

다섯째 브랜드 이미지를 끌어올릴 수 있는 뚜렷한 신모델이 없다는 점이다.
자동차 전문가들은 현대차가 앞으로 5년 후 또는 10년 후에도 지금처럼 싼 값에 차를 판매하긴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한다. 물가 상승에 따라 생산비도 높아지고 중국과 동남아의 후발 업체들의 도전도 만만찮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대차는 최근 3~4년 사이에 10년·10만마일 무상 보증수리 전략을 통한 판매 확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미래에 안정적인 수익을 보장할 수 있는 고급 차종을 내놓아야 한다. 벤츠·BMW·도요타·혼다·포드·GM 등 선진 자동차업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차종을 개발해 브랜드 이미지를 높여야 미래에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현대차는 지금까지 판매 확대에만 집착해 왔을 뿐 시장 판도를 바꿀 만한 차종 개발은 소홀히 해 왔다. 지난해부터 미국시장에 판매한 싼타페와 그랜저XG 정도가 전부였다.
이 때문에 자동차 전문가들은 “현대차가 고급차종 개발에 적극 나서지 않고 10년·10만마일 무상 보증수리를 내세워 판매 확대에만 주력한다면 일시적으로 미국 소비자들에게 환영받을 수는 있어도 영원히 ‘싸구려 차’의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백강녕 주간조선기자 young100@chosun.com) 2002.1.17
Posted by 카즈앤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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