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지역에서는 차를 타고 음식을 주문하는 드라이브-인(혹은 관통한다는 의미에서 Through를 사용하여 드라이브-쓰루라고도 한다)은 자연스러운 일상생활의 한 모습으로 간주되고 있다.
이 주차장이 넓은 지역에서 우리나라에서와 같이 차를 주차하지 않고 게으른 모습으로 음식물을 주문하고 냉큼 받아서 자리를 떠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먹는다'라는 행위와 '자동차'라는 이동수단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햄버거 한 세트를 주문하고 차 안에서 먹는다거나 도로 변에 차를 잠시 주차하고 아무 곳이든 노출된 공간에서 자리를 잡고 먹는다함은, "음식은 늘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공간에서 먹어야 한다"는 한국식 사고에서라면 언뜻 이해가 안되는 것이고 혹시 그런 사람을 보게 되면 뭔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처럼 보이는 것이 우리나라다.
아직까지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동차를 문화의 한 공간, 혹은 내 삶의 공간(집, 방)의 연장선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자동차 실내공간과 내 집 안방과는 확연하게 구분된다는 것이고 이것은 신발을 벗고 방에 들어가야 하는 문화와 신발을 신고 들어가는 문화적 차이와 같다. 이 작은 인식의 차이가 아직도 한국적 자동차문화의 부재(不在)라는 것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변형된 형태의 한국적 '드라이이브-인 문화'를 찾을 수도 있다. 정체구간에서 엿, 음료수 등을 팔고 사먹는 행위. 노변에서 토스트, 성인용품 등을 파는 행위 그리고 길거리 판금사업도 비슷한 유형의 것임에는 분명하지만 여전히 차에서 내려야 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드라이브-인이든 드라이브-쓰루든 북미지역의 것과는 차이점이 있다. 엿장사. 그렇다. 정체구간이라고 해도 특히 사거리나 진입로 부근은 사실 상당히 위험한 공간이다. 그리고 행상은 하루 종일 매연을 맡고 있어야 하니 열악한 조건에서 돈을 벌고 있는 것이겠고 팔고 있는 음식물들이 오염되는 것도 사실은 큰 문제일 것이다.
노점상을 양성화하여 등록증을 내어주고 또 노점상 조합을 결성했던, 이제까지의 과정들을 생각할 때, 끝도 없는 단속보다는 오히려 도로 및 자동차관련 법규와 안전 등에 관한 대비책 그리고 감독시스템의 개발을 전제로 타협점을 찾는 것이 더 나을 듯 보인다. 물론, 차가 달리는 도로에서 취식물을 파는 행위는 논리적으로 부당하다. 그런데 혹시나? 이동정비업이 불법인 것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이상스러운 직업, 상행위'라는 것은 다분히 우리네 관습적인(그 만큼 폐쇄적인) 사고의 기초 위에서 일고의 여지가 없는, 밑도 끝도 없는 단속의 대상으로서만 평가되어 왔던 것은 아닐까?
거꾸로 생각해보자. 전국 주요도시에 홍등가는 여전히 존재하고 그 홍등가의 밤 거리를 경찰이 순찰하고 있다. 이것은 일종의 논리적 모순이다. 만일, 그 동안 양성화든 근절이든 체계적인 시도가 없었다고 하면 과연 어떤 것이 맞는지를 검증하지 못했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모든 것은 '사회적 방치'로 간주될 수 있는 사항이기도 하다.
이 주차장이 넓은 지역에서 우리나라에서와 같이 차를 주차하지 않고 게으른 모습으로 음식물을 주문하고 냉큼 받아서 자리를 떠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먹는다'라는 행위와 '자동차'라는 이동수단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햄버거 한 세트를 주문하고 차 안에서 먹는다거나 도로 변에 차를 잠시 주차하고 아무 곳이든 노출된 공간에서 자리를 잡고 먹는다함은, "음식은 늘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공간에서 먹어야 한다"는 한국식 사고에서라면 언뜻 이해가 안되는 것이고 혹시 그런 사람을 보게 되면 뭔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처럼 보이는 것이 우리나라다.
아직까지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동차를 문화의 한 공간, 혹은 내 삶의 공간(집, 방)의 연장선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자동차 실내공간과 내 집 안방과는 확연하게 구분된다는 것이고 이것은 신발을 벗고 방에 들어가야 하는 문화와 신발을 신고 들어가는 문화적 차이와 같다. 이 작은 인식의 차이가 아직도 한국적 자동차문화의 부재(不在)라는 것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변형된 형태의 한국적 '드라이이브-인 문화'를 찾을 수도 있다. 정체구간에서 엿, 음료수 등을 팔고 사먹는 행위. 노변에서 토스트, 성인용품 등을 파는 행위 그리고 길거리 판금사업도 비슷한 유형의 것임에는 분명하지만 여전히 차에서 내려야 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드라이브-인이든 드라이브-쓰루든 북미지역의 것과는 차이점이 있다. 엿장사. 그렇다. 정체구간이라고 해도 특히 사거리나 진입로 부근은 사실 상당히 위험한 공간이다. 그리고 행상은 하루 종일 매연을 맡고 있어야 하니 열악한 조건에서 돈을 벌고 있는 것이겠고 팔고 있는 음식물들이 오염되는 것도 사실은 큰 문제일 것이다.
노점상을 양성화하여 등록증을 내어주고 또 노점상 조합을 결성했던, 이제까지의 과정들을 생각할 때, 끝도 없는 단속보다는 오히려 도로 및 자동차관련 법규와 안전 등에 관한 대비책 그리고 감독시스템의 개발을 전제로 타협점을 찾는 것이 더 나을 듯 보인다. 물론, 차가 달리는 도로에서 취식물을 파는 행위는 논리적으로 부당하다. 그런데 혹시나? 이동정비업이 불법인 것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이상스러운 직업, 상행위'라는 것은 다분히 우리네 관습적인(그 만큼 폐쇄적인) 사고의 기초 위에서 일고의 여지가 없는, 밑도 끝도 없는 단속의 대상으로서만 평가되어 왔던 것은 아닐까?
거꾸로 생각해보자. 전국 주요도시에 홍등가는 여전히 존재하고 그 홍등가의 밤 거리를 경찰이 순찰하고 있다. 이것은 일종의 논리적 모순이다. 만일, 그 동안 양성화든 근절이든 체계적인 시도가 없었다고 하면 과연 어떤 것이 맞는지를 검증하지 못했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모든 것은 '사회적 방치'로 간주될 수 있는 사항이기도 하다.